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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랜드> 떠돌이 삶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는 사람들

by rednoodle02 2025. 7. 3.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는 단순히 유랑자들의 삶을 따라가는 도큐드라마가 아니다. 이 영화는 '집'이라는 물리적 개념이 사라진 뒤에도 인간은 어떻게 자신만의 존엄과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는지를 말한다. 미국 경제 침체와 지역 공동체 붕괴의 현실을 배경으로, 집을 잃고 밴 한 대에 의지한 채 전국을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조용히 비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정이나 연민을 구걸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평소에 ‘정상적인 삶’이라 여겼던 기준이 얼마나 편협한지를 드러내며, 떠돌며 사는 삶 속에서도 따뜻함, 연대, 의미를 발견해낸다. 『노매드랜드』는 표면적으로는 미국 로드무비지만, 실상은 전 세계 모든 ‘경계선에 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노매드랜드 관련 사진

‘집’이 사라진 시대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펀은 네바다의 산업도시 엠파이어에서 수십 년간 살아왔다. 하지만 석고 공장이 문을 닫고, 도시는 사라지며 그녀는 일터도, 동네도, 남편도 모두 잃는다. 남은 것은 중고 밴 한 대와, 그 안에 겨우 들어맞는 몇 개의 살림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낡은 밴에 몸을 실은 채 스스로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 『노매드랜드』는 이처럼 자의와 타의가 섞인 상태로 사회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을 다룬다. 영화는 이들을 낙오자나 패배자가 아닌,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한 존재로 바라본다. 펀은 ‘정착’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녀를 떠밀었고, 그녀는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존엄을 유지한다. 이 영화는 '집이 없다는 것'이 반드시 불행이나 결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자유와 외로움 사이의 경계에서

노매드의 삶은 흔히 낭만적 자유로 포장되지만, 영화는 그것의 이면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펀은 아마존 물류센터, 식당, 국립공원 등 계절직을 전전하며 노동을 이어간다. 화장실 청소와 그릇 설거지, 추운 밤에 밴 안에서 이불을 덮고 자는 일상이 반복된다.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는 항상 외로움과 맞닿아 있다. 친구들과의 짧은 교류, 장터에서의 재회, 캠프파이어에서 나누는 대화가 소중한 이유는 이 삶이 본질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람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명제를 확인시키며, 이동의 자유가 주는 해방감과 동시에 깊어지는 고독의 무게를 전한다. 펀은 누군가의 초대에도 머물지 않고, 관계가 깊어질 조짐이 생기면 떠나기를 택한다. 이는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이자, 그녀가 세상과 맺고 있는 조심스러운 거리다. 노매드의 자유는 절제된 감정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불완전한 자유다.

노매드 공동체, 사라진 가족을 대신한 연대

노매드들의 삶에는 혈연은 없지만, 공동체가 있다. 주차장에서 마주친 노인은 밴 수리법을 알려주고, 한 노인은 자신의 삶을 고백하며 죽음을 준비한다. 그들의 대화는 길고 거창하지 않지만, 진심은 오히려 짧은 말 안에 배어 있다. 이 공동체는 법적 보호나 제도적 보장이 없다. 대신 마음과 경험이 유일한 자산이며, 연대는 생존의 기반이 된다. 펀은 이 안에서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서 온기를 느끼고, 상실의 고통을 서서히 이겨낸다. 영화가 특히 인상적인 이유는 등장 인물의 상당수가 실제 노매드라는 점이다. 배우가 아닌 현실 속 인물들이 등장함으로써 극의 리얼리즘이 깊어진다. 『노매드랜드』는 노매드를 사회적 약자나 비주류로 단정하지 않고,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 유형'으로 조명한다. 이는 현대 사회의 구조가 배제해온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삶의 방식과 철학이 존재한다는 점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결론: 떠도는 삶에도 집은 있다

『노매드랜드』는 “집은 장소가 아니라, 기억과 존엄이 깃든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펀은 떠도는 와중에도 자신의 방식을 지켜내며, 결국 자신이 속한 자리를 직접 만든다. 우리는 종종 ‘정착’만이 안정이고, ‘소유’만이 삶의 증거라 믿지만, 이 영화는 그 믿음을 조용히 흔든다. 집이 없더라도 삶은 계속되고, 사랑도 존재하며, 인간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광활한 자연 속 작은 밴 한 대,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감정은 오히려 더 넓고 깊은 울림을 준다. 『노매드랜드』는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펀들에게, 그리고 언젠가 경계선에 서게 될 우리 모두에게 말한다. “떠돌 수밖에 없는 삶이라도, 그 안에는 여전히 당신만의 집이 있을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