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퀘어>(The Square, 2017,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현대 미술관을 배경으로 예술의 이상과 현실, 그리고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풍자 드라마다. 영화의 중심에는 ‘더 스퀘어’라 불리는 설치 작품이 있다. 이 사각형 영역은 “여기 안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신뢰하고 보호한다”는 선언을 담지만, 정작 그 상징을 기획한 주체와 이를 소비하는 사회는 그 이상을 실천하지 못한다. 미술관 큐레이터 크리스티안은 매끈한 언어와 이미지로 ‘선의’를 팔지만, 사소한 사건 앞에서 폭주하는 심리와 모순된 행동으로 자신의 위선을 드러낸다. 작품은 광고·홍보·미디어가 이상을 포장하는 메커니즘을 해체하면서, 관객에게 “우리는 정말로 타인의 존엄을 지키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답게 날 선 유머와 정교한 mise-en-scène, 롱테이크의 심리적 압박이 어우러져 예술이 사회에서 가져야 할 책임과 개인이 수행해야 할 윤리의식을 끝까지 추궁한다.

‘더 스퀘어’라는 약속: 예술의 선언과 현실의 단절
‘더 스퀘어’는 물리적으로는 단순한 사각형 바닥 조형물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 사각형은 공공의 약속, 즉 “이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책임진다”는 규범적 선언으로 작동한다. 문제는 선언이 배치된 순간부터다. 표식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그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의 행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미술관은 ‘메시지’를 소유하지만 ‘실천’을 갖지 못하고, 관람자는 ‘의미’를 소비하지만 ‘책임’을 떠안지 않는다. 이 분절은 현대 예술이 처한 구조적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작품은 슬로건과 캠페인으로 선의를 브랜딩하지만, 그 선의가 구체적 타자와 마주하는 찰나 균열이 생긴다. 크리스티안이 도난 사건을 당하고 택한 방식은 상호 신뢰의 반대편, 즉 의심·낙인·보복에 가깝다. 예술의 언어와 개인의 실천이 충돌할 때, ‘더 스퀘어’는 비어 있는 프레임이 된다. 영화는 그 ‘빈 프레임’을 집요하게 비춘다. “좋은 가치”를 말하는 것과 그 가치를 사소한 불편 앞에서도 유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행위라는 점을, 공간과 몸짓, 침묵과 시선의 균열로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적 선택을 재검토하게 만든다.
큐레이터 크리스티안: 매끈한 담론 뒤의 흔들리는 윤리
크리스티안은 미술관의 얼굴이자, 정당한 언어로 세련된 가치를 유통하는 전문가다. 그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직업적 무기이자 방어막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의 일상을 따라가며 매끈한 언어 뒤에 숨은 균열을 노출한다. 사소한 위협 앞에서 그는 불안을 통제하지 못하고, 책임을 외주화하며, 타인의 사정을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그가 홍보팀과 함께 택한 자극적 캠페인은 ‘관심경제’의 법칙에는 충실하지만, ‘더 스퀘어’가 표명한 윤리와는 정반대의 효과—공포와 혐오의 확대—를 낳는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인물의 위선을 도덕극처럼 단죄하지 않는다. 대신 사무실, 프레스룸, 갤러리 홀 같은 세팅을 정교한 무대로 구성하고, 인물의 몸짓과 시선, 침묵을 길게 머금은 롱테이크로 관객을 불편하게 붙잡아둔다. 크리스티안의 선택은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익숙한 ‘합리화’의 언어—성과, 효율, 주목, 리스크 관리—로 쉽게 포장 가능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친숙함 자체가 문제의 핵심임을 지적한다. 타인의 곤경 앞에서 언어는 빠르게 작동하지만,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 느림과 머뭇거림 속에서 ‘더 스퀘어’의 약속은 무력해진다.
퍼포먼스와 파국: 문명적 규범이 시험받는 순간
영화의 백미로 회자되는 갈라 디너 퍼포먼스 장면은 문명과 폭력, 제의와 야만의 경계를 전율적으로 흔든다. 침묵과 예법으로 통제된 상류층의 식탁에, 동물적 신체를 연기하는 퍼포머가 난입하여 ‘위험’을 시뮬레이션한다. 처음 관객은 낯선 예술적 도발을 ‘연극’으로 소비하며 웃고 박수치지만, 불편과 공포가 임계치를 넘는 순간 누구도 개입하지 않는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본다. 개입은 ‘누군가’의 몫이 되고, ‘나’는 구경꾼으로 남는다. 그 집단적 무위(無爲)는 ‘더 스퀘어’의 선언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카메라는 폭력이 진짜가 되는 찰나까지 외면하는 집단의 표정을 포착하고, 결국 뒤늦게 폭발하는 집단적 제압이 얼마나 추하고 무책임한지 보여준다. 이 시퀀스는 영화 전체의 축약이다. 제도는 상징을 만들고, 상징은 안전을 약속하지만, 실제 위험과 타인의 곤경 앞에서 공동체는 반복적으로 실패한다. 외스틀룬드는 관객을 방심하게 했다가, 그 방심이 곧 가담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치명적 ‘불편함’을 선사한다. 예술은 여기서 ‘거울’이 아니라 ‘시험대’가 된다. 우리는 시험에 실패한다.
결론 - 선언에서 실천으로: 빈 사각형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몸
<더 스퀘어>는 예술과 도덕을 화려한 언어로 치장한 후 박물관의 유리 케이스에 보관하는 관성을 깨뜨린다. 사각형은 선언일 뿐,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제도도 문구도 아닌 ‘개인의 몸’임을 끈질기게 상기시킨다. 크리스티안의 일련의 오판과 뒤늦은 사과, 자극적 홍보의 역풍, 갈라의 집단적 실패는 모두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네가 그 사각형에 들어섰을 때,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는 답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시선의 회피, 책임의 유예, 개입의 지연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비용을 시각화한다.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선물이다. 불편함은 감정적 소모가 아니라 윤리적 감각의 재가동이고, 선언을 실천으로 옮기는 첫 움직임이다. 오늘날의 ‘관심경제’는 선의를 상품화하고, 알고리즘은 분노를 증폭한다. 그 속에서 ‘더 스퀘어’는 구식처럼 보이는 규범—서로를 신뢰하고 보호한다—을 고집스럽게 복원한다. 이 규범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안에서, 횡단보도 앞에서, 댓글 창에서 반복되는 미세한 선택의 총합으로 성립한다. 그러므로 영화는 예술비평이면서 동시에 생활윤리의 매뉴얼이다. 사각형의 경계선은 우리 발끝에서 시작한다. 그 선을 넘는 용기, 망설임보다 빠른 개입, 말보다 먼저 나가는 몸짓이 ‘비어 있던 프레임’을 현실로 바꾼다. <더 스퀘어>가 남기는 마지막 감각은 장엄한 결론이 아니라, 다음 장면에서의 나의 행동을 바꾸려는 작은 불편한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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