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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더> 기억이 무너질 때 인간은 무엇을 붙잡는가

by rednoodle02 2025. 7. 2.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더 파더(The Father, 2020)』는 치매를 앓는 한 노인의 시선을 따라가며, 기억과 현실이 무너지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다. 단순히 병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 정체성의 붕괴와 가족 간의 관계, 돌봄의 의미까지 깊이 있게 탐구한다. 주인공 안소니는 점차 사랑하는 딸과 일상의 단서들을 잃어가며 혼란 속에 빠져들고, 관객 역시 그 혼란을 함께 겪게 된다. 이 영화는 관찰자가 아닌 '체험자'의 위치에 관객을 세워, 치매 환자의 세계를 감정과 감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안소니 홉킨스는 이 작품에서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상실과 고립의 감정을 세밀하게 전달한다. 『더 파더』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나 의학적 스토리를 넘어서, 기억이란 것이 인간 존재의 근간임을 고요하면서도 강력하게 설파하는 작품이다.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끝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이 영화는 잊을 수 없는 감정적 체험을 제공한다.

 

영화 더 파더 관련 사진

기억이 사라질 때, 나는 누구인가?

영화는 안소니의 시점을 따라간다. 그는 처음에는 자립심 강한 노인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딸 앤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방금 전까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고, 전혀 다른 인물이 같은 사람으로 등장하는 혼란은 관객에게도 마치 미로에 갇힌 듯한 감각을 준다. 이 구성은 ‘기억’이란 요소가 인간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안소니는 기억을 잃어가는 동시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단지 치매 환자의 증상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영화는 관객에게 “당신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연속된 자아를 유지한다. 그 기억이 끊어질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로 남는가?

관객의 시점까지 뒤흔드는 치매의 체험적 연출

『더 파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연출 방식이다. 같은 장면에 서로 다른 배우가 등장하거나, 동일한 장소가 조금씩 바뀌며 반복되는 구조는 의도된 혼란을 유발한다. 이는 단순한 영화적 장치가 아니라, 관객이 치매 환자의 ‘인지 혼란’을 간접 체험하게 만든다. 딸 앤이 어느 날은 엉뚱한 배우로 바뀌고, 집의 구조가 달라지고, 시간의 흐름이 거꾸로 재생되기도 한다. 안소니가 느끼는 공포와 불신, 무력감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이러한 ‘정신적 몰입’은 감정적인 공감과 함께 인지적 충격을 함께 준다. 치매에 대해 머리로만 알고 있던 관객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 깊이 이해하게 된다. 『더 파더』는 단순히 병을 묘사한 영화가 아니라, 병의 ‘내면 세계’를 시각화한 탁월한 예술적 시도다.

가족의 사랑과 무력감, 그리고 남겨진 자의 고통

앤(올리비아 콜맨 분)은 치매로 무너져가는 아버지를 보며 끝없는 애정과 인내를 보인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언제나 기쁨으로 보상받지 않는다. 아버지는 때때로 그녀를 의심하고, 심지어 모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앤은 그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이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복잡성과 희생, 감정적 피로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보호자 입장에서의 심리도 놓치지 않는다. 끝없는 돌봄 속에서 앤은 무너져가고, 결국 프랑스로 떠나려는 결정을 내리며 ‘사랑이 전부일 수 없는 현실’도 보여준다. 인간은 사랑하지만, 지치기도 한다. 안소니가 요양원 침대에서 어린아이처럼 우는 마지막 장면은 이 모든 감정의 압축이다. 『더 파더』는 인간 존재가 얼마나 취약한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존엄한지를 담담하게 드러낸다.

결론: 치매는 병이 아니라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이다

『더 파더』는 치매라는 주제를 단순히 의학적 현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기억이 무너질 때 인간 존재는 어떻게 흔들리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가에 대해 끈질기게 묻는다. 안소니는 점차 모든 시간의 흐름을 잃고, 공간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 안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는 감정은 바로 ‘두려움’과 ‘고독’, 그리고 ‘의존’이다. 이 영화는 그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늙어간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안소니의 얼굴과 떨리는 눈빛, 반복되는 질문에서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안소니가 요양병원에서 보호사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은 단순한 연민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처절한 응답처럼 다가온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가장 나약한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것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이 장면은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행위인지, 그리고 기억을 잃어버린 존재조차 여전히 사랑받아야 마땅하다는 진리를 말한다.

『더 파더』는 관객에게 치매를 '이해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느끼게' 만든다. 그 체험이 끝난 후, 우리는 치매 환자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구성하는 기억이라는 요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기억은 사라질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존재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란, 기억을 잃고도 여전히 사람일 수 있는 존재이기에, 더더욱 존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