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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낯선 땅에 뿌리내린 이민 가족의 희망과 현실

by rednoodle02 2025. 7. 5.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Minari, 2020)』는 1980년대 미국 아칸소를 배경으로, 한국계 이민자 가족이 낯선 땅에 정착하며 겪는 현실과 희망, 가족 간의 갈등과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닭 병아리 성별을 감별하는 일을 하던 제이콥은 가족을 데리고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하며 농장을 시작하지만, 낯선 환경과 경제적 불안, 문화적 충돌 속에서 가족은 점점 시험에 빠진다. 여기에 외할머니 순자가 한국에서 건너와 가족의 균형에 또 다른 파동을 일으킨다. 『미나리』는 단순한 이민 드라마를 넘어, 뿌리내림이라는 보편적 인간 욕망과 정체성, 그리고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의미를 되묻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조용한 풍경과 일상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진폭을 통해, 이민자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울림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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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 관련 사진

운 시작, 불안 속에서도 희망을 지닌 제이콥

제이콥은 가족의 미래를 위해 도시의 안정된 일자리를 포기하고, 아칸소의 외진 시골로 이주한다. 그는 농장을 통해 한국 채소를 키우며 ‘진짜 미국식 성공’을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그 시작은 녹록치 않다. 집은 바퀴 달린 트레일러고, 땅은 메말랐으며, 물 공급조차 불안정하다. 아내 모니카는 도시의 안정된 삶을 원했고, 갑작스러운 시골 이주는 그녀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은 같은 미래를 바라보지만, 방법과 현실 인식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제이콥은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족과의 정서적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그의 희망은 때로는 고집처럼 보이고, 가족에게는 불안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제이콥은 포기하지 않는다. 『미나리』는 바로 그 ‘버팀’에 주목한다. 어떤 대단한 성공보다, 가족을 위해 무너지지 않으려는 의지가 진짜 희망이라는 사실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낯선 땅에서 피어난 사랑, 순자의 존재와 세대 간의 연결

외할머니 순자의 등장은 가족 내에 새로운 리듬을 가져온다. 그녀는 한국에서 건너온 전형적인 ‘할머니’ 같지 않다. 욕을 하고, 카드게임을 좋아하고, 미국식 문화에 무감각하다. 어린 데이빗은 그런 순자를 처음엔 받아들이지 못하고, “냄새가 이상하다”,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순자는 손주에게 한국의 정서를 전하고, 가족 안에 있던 감정의 간극을 서서히 메운다. 그녀는 데이빗과 함께 산을 오르고, 미나리를 심으며, 삶의 지혜를 조용히 나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세대 교감을 넘어, ‘이민자의 뿌리’가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상징한다. 특히 미나리는 순자가 심은 식물로, 아무 곳에나 잘 자라며, 다시 피어나고, 다시 살아난다. 영화는 이 식물을 통해 생명력, 회복력, 그리고 적응이라는 주제를 은유적으로 풀어낸다. 순자의 존재는 가족에게 단순한 방문자가 아니라, 정체성과 감정의 연결 고리가 된다.

불안과 붕괴, 그러나 다시 피어나는 가족의 회복력

영화 후반, 제이콥과 모니카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생계도 위태로워진다. 병아리 감별 일도 줄어들고, 농사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가족은 해체 직전까지 몰린다. 데이빗의 심장 질환, 언어와 문화의 차이, 경제적 위협 등 이민자 가족이 맞닥뜨리는 현실의 무게는 한계점에 이른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 순자가 실수로 창고에 불을 내면서 모든 농작물이 타버리는 순간, 가족은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이 장면은 파괴가 아닌 재탄생의 시작이다. 제이콥은 순자를 비난하지 않고, 모니카는 남편을 다시 붙잡는다. 그리고 데이빗은 “할머니랑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순자에게 진심을 드러낸다. 이 순간들이 바로 가족이 다시 서로를 이해하고 품게 되는 시간이다. 영화는 회복을 극적인 사건이 아닌, 일상의 소소한 결정과 행동 속에서 그려낸다. 결국 이 가족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며, 그것은 미나리처럼 조용하지만 강인하게 자란다.

결론: 미나리는 어디서든 자란다, 희망은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다

『미나리』는 특정 민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시대와 지역의 ‘이주자’들이 겪는 보편적인 이야기다.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했던 이 가족의 분투는, 단지 생존의 이야기가 아닌 ‘존재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영화는 말한다. 고단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함께라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고. 그리고 그 회복은 말 한마디나 눈물보다, 식물 한 포기처럼 조용하고 단단하게 이루어진다고. 미나리는 아무 곳에서나 자란다. 물가에서도, 바위 틈에서도, 이방인의 밭에서도. 그 생명력은 곧 이 영화의 메시지다. 뿌리를 내리는 건 단지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지키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미나리』는 그 사실을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깊은 울림으로 전한다. 희망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우리가 잊고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