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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했던 한 소녀의 사춘기성장기

by rednoodle02 2025. 7. 12.

 

소녀 은희의 상실과 성장, 영화 벌새가 전하는 침묵의 서사

영화 ‘벌새’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배경으로 한 평범한 중학생 은희의 내면 성장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한 성장영화를 넘어서, 가부장적 사회, 가족 내 폭력, 사회적 무관심, 청소년기의 정체성 혼란 등 다양한 주제를 섬세하게 다룬다. 김보라 감독은 첫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출력과 인물 간 감정의 층위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은희의 침묵 속에서 진심을 읽도록 만든다. 은희는 학교와 집, 사회 모두에서 소외되지만, 조용한 저항과 감정의 흡수 과정을 통해 ‘성장’이라는 이름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 글에서는 영화 벌새의 핵심을 이루는 내면 심리, 주변 인물과의 감정 구조, 그리고 시대적 맥락에서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영화 벌새 관련 사진

상실의 연속, 감정을 삼키는 은희

영화 ‘벌새’에서 주인공 은희는 끊임없는 상실을 겪는다. 어머니와의 소통 부재, 아버지의 폭력적인 권위, 오빠의 폭력과 무관심, 연인의 배신, 그리고 친구와의 갈등까지 그녀의 삶은 감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심지어 자신을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 한문 선생님 영지마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잃게 되면서, 은희는 진정한 위로의 창구마저 사라지는 절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상실을 소란스럽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감정은 은희의 침묵, 눈빛, 몸짓,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조용히 축적된다. 김보라 감독은 은희의 고통을 외적인 분출이 아닌 ‘내면으로 수렴되는 감정’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공감의 층위를 따라가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벌새는 단지 사건의 나열이 아닌 감정의 축적이며, 상실의 반복 속에서 자아를 재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깊이 있게 담아낸다.

 

관계의 단절 속 피어나는 자아

은희는 가족 안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속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가족은 그녀를 하나의 ‘개인’으로 인식하지 않으며, 학교와 사회도 그녀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이런 단절 속에서 은희는 외로움을 감정적으로 겪기보다는, 관찰하고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은희가 자기 자신을 정립해나가는 발판이 된다. 그녀는 세상의 폭력에 무력하게 휘둘리지 않고, 서서히 자신만의 판단 기준과 감정의 울타리를 형성해간다. 특히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는 은희가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전환점이다.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조차 은희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벌새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사회적 단절 속에서 자라나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침묵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1990년대 서울, 시대와 공간이 말하는 정서

‘벌새’는 1994년 서울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무대 삼아, 그 시대가 가지는 정서와 억압을 은희의 시선을 통해 전달한다. 성수대교 붕괴는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상징적으로 끊어진 연결, 사회의 무관심, 개인의 붕괴를 은유한다. 거리의 간판, 복도와 골목의 어둠, 아파트의 구조까지 모든 배경은 은희의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처럼 기능한다. 당시 한국 사회는 IMF 전야의 팽팽한 불안감과 함께 강한 규율, 가부장 중심 문화가 팽배했다. 영화는 이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음악이나 뉴스 보도, 가정 내 대화 등을 통해 암묵적으로 드러내며, 은희가 감정적으로 성장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억압을 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벌새의 공간은 단지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질감이 녹아든 정서적 무대이며, 그 안에서 은희는 삶의 결을 스스로 발견해간다.

 

결론 : 벌새의 날갯짓, 침묵에서 피어나는 성장

‘벌새’는 특별한 사건이 아닌, 일상의 조각들로 구성된 영화이지만 그 속에 담긴 정서적 파장은 매우 깊고 크다. 은희는 끊임없는 단절과 상실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경험을 자기 내면에 침전시키며 감정의 근육을 키워나간다. 이는 곧 진정한 의미의 성장이다. 벌새는 소리를 내지 않아도, 가장 많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화가 보여주는 ‘진실성’ 때문이다. 과장되지 않은 연출, 감정의 강요 없이 펼쳐지는 상황들, 그리고 침묵 속에서도 강하게 전달되는 은희의 시선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누군가는 은희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또 누군가는 지금의 고통을 위로받는다. 벌새는 그런 영화다. 작지만, 오래도록 울리는 날갯짓. 조용하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감정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