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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 고통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성과 선택의 윤리

by rednoodle02 2025. 7. 17.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세일즈맨(The Salesman, 2016)』은 겉으로는 단순한 사건을 다룬 이란 영화지만, 내면에는 인간의 윤리, 복수, 존엄, 용서와 같은 보편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묵직하게 던진다. 고등학교 교사이자 연극배우인 에마드와 그의 아내 라나는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삶의 균형이 깨지고, 그들은 각자 고통과 혼란을 감내하게 된다. 연극 속 ‘세일즈맨의 죽음’과 현실이 절묘하게 교차되며, 관객은 인물들의 내면과 선택을 조용히 응시하게 된다. 사건 자체보다도 그에 대응하는 각자의 태도와 감정이 핵심이다. 파르하디는 극적인 장면보다 침묵과 시선, 갈등의 여백을 통해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며, 관객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 ‘내 감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영화는 단순한 범죄 피해의 이야기를 넘어선,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다.

 

영화 세일즈맨 관련 사진

연극 무대 뒤의 진실, 일상이 무너진 순간

영화는 고등학교 교사이자 아마추어 연극배우인 에마드와 그의 아내 라나가 살던 아파트가 붕괴되며 급히 다른 집으로 이사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 집은 이전 세입자가 성매매를 하던 여성으로, 주변 이웃조차 꺼리는 장소였다. 어느 날, 라나는 샤워 중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하고, 정신적 충격에 빠진다. 범인은 도망가고 정체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 사건 이후 부부의 삶은 급격히 어긋나기 시작한다. 에마드는 분노와 자책, 불안정한 감정 속에서 범인을 찾으려 하고, 라나는 그 모든 것에 말을 아끼며 조용히 고통을 감내한다. 이 장면부터 영화는 단순한 범죄 피해자의 이야기로 흐르지 않는다. ‘왜 라나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려 하는가’, ‘에마드의 복수심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같은 복잡한 윤리적 질문이 끊임없이 관객을 괴롭힌다. 연극 속 대사와 현실의 언어가 얽히며, 인물들은 점점 심리적 압박 속에서 방향을 잃어간다.

복수인가 정의인가, 감정의 윤리적 충돌

에마드는 결국 의심 가는 남성을 추적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는 노인이며, 가족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에마드는 그에게 자백을 요구하고, 그의 실수에 대해 책임지게 하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에마드 자신도 심각하게 흔들린다. 그는 피해자의 남편으로서 복수를 원하지만, 동시에 이 노인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혼란을 느낀다. 라나는 에마드의 행동에 반대하며, 이 모든 과정이 오히려 자신에게 2차적 상처를 준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가장 큰 윤리적 충돌을 상징한다. 관객은 에마드의 분노에 공감하면서도, 그 분노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영화는 복수를 정의처럼 포장하는 현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며, 윤리란 감정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준다. 에마드는 연극 속에서는 감정을 통제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서서히 파국을 향해 간다.

침묵하는 피해자, 복수로 구원받지 못한 가해자

라나는 처음부터 사건을 덮고 조용히 지나가고자 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견디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마드는 복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의를 강요하고, 그 과정에서 라나의 고통은 점점 외면당한다. 결국 범인을 대면하고 나서야 에마드는 자신의 감정이 오히려 타인을 더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법의 심판 대신 감정의 심판을 선택하지만, 그 끝에 남은 것은 허탈함뿐이다. 영화는 정의가 실현되었을 때조차 감정은 회복되지 않으며, 인간은 결국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가해자는 무너졌지만, 피해자는 회복되지 않았고, 에마드는 그 사실 앞에서 스스로 무너진다. 파르하디 감독은 이 장면에서 침묵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대사가 아닌 표정과 몸짓으로 감정을 전달하며, 관객 스스로 감정을 추론하게 만드는 영화적 방식은 이 작품의 진정한 미덕이다.

결론 – 감정이란 이름의 정의, 누구를 위한 선택인가

『세일즈맨』은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심리 드라마이자, 정의라는 단어에 감정이 덧씌워졌을 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신해 분노하고, 누군가를 위해 정의를 행한다고 믿지만, 그 감정이 진정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에마드는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었지만, 라나는 그 정의가 자신의 고통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그 균열을 조용히 관찰하며, 그 속에서 인간성의 깊이를 파고든다. 연극과 현실, 역할과 실존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관객은 감정과 도덕의 진짜 경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 영화는 결코 속 시원한 결말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야말로 우리가 진짜 ‘인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세일즈맨』은 침묵과 시선으로, 인간이 감정 속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동시에 복잡한 존재인지를 탁월하게 그려낸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