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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언어와 삶의 존엄을 사유하는 고요한 통찰

by rednoodle02 2025. 7. 23.

 

이창동 감독의 <시>는 인간의 존엄과 언어, 그리고 죽음과 책임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 미자는 손자의 범죄를 알게 된 후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며 점차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극적인 사건보다 인물의 정적이고 섬세한 감정 변화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와 인간 내면의 윤리를 조명한다. 시라는 예술을 통해 진실을 말하려는 미자의 여정은 사회적 침묵에 맞서는 개인의 고독한 투쟁이다. 이 영화는 일상적 장면들 속에 인간의 본질을 담아내며,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고통과 마주하는 과정을 정직하게 그려낸다. <시>는 단순한 범죄 드라마가 아니라, 언어와 감각, 인간성의 존재 이유를 되묻는 깊은 철학적 작품이다.

 

영화 시 관련 사진

 

시를 배우는 노인, 삶을 이해하기 위한 시작

영화는 미자가 시 창작 수업에 참여하면서 시작된다. 꽃과 사물, 일상에서 영감을 찾으려는 그의 모습은 처음에는 다소 엉성하고 어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지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자신을 이해하려는 과정이다. 미자는 말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며 기억을 점점 잃어가지만, 오히려 그 상실의 과정 속에서 시를 통해 더욱 분명한 현실을 응시하게 된다. 특히 그가 자연 속에서 관찰하고, 일상적 풍경에 감탄하는 장면들은 단순한 미화가 아니라, 감각을 되살리려는 노력이며, 언어를 통해 자신을 다시 연결시키려는 행위다. 시 창작은 미자에게 삶을 기록하고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되며, 사회와 자신 사이의 다리를 놓는 방식이다. 시를 쓰는 행위는 단지 문학적 취미가 아니라, 현실과 도덕 사이에서 침묵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된다.

 

손자의 범죄와 침묵하는 어른들

미자가 마주하는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손자가 또래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했으며, 그 여학생은 결국 자살에 이른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사건을 둘러싼 어른들의 태도다. 가해자들의 부모는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 하고, 학교와 지역 사회는 조용히 넘어가기를 바란다. 이때 미자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단순히 숨길 수 없는 도덕적 무게로 받아들인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이 죄의식 때문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을 언어로 남기려는 그의 노력은, 사회 전체가 외면한 고통을 홀로 끌어안는 행위다. 특히 피해자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이나, 손자의 무관심한 반응은 미자의 고통과 무기력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언가를 쓰고, 표현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침묵의 공모에 맞서기 위해, 언어를 무기로 택한 것이다.

 

시가 말하는 진실, 아름다움과 고통의 공존

영화는 시가 단지 아름다운 언어의 집합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기록하는 방식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미자는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정과 책임, 고통을 조용히 표현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의 시, "아름다운 것들"은 단순한 자연 찬미가 아니라, 삶의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작은 빛과 진실에 대한 고백이다. 이 시는 피해 소녀의 관점에서 쓰인 것으로 해석되며, 미자가 그녀의 고통을 대신 써주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미자가 점점 기억을 잃어가며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야 할 언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시는 고통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감각하고 포착하려는 인간의 태도임을 영화는 조용히 말한다. 이처럼 <시>는 말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말하기, 외면되는 현실에 대한 기록으로 기능하며, 언어의 윤리성을 질문하는 작품이다.

 

결론 - 시가 남긴 마지막 말

<시>는 한 인물이 어떻게 진실과 마주하고, 그것을 언어로 남기려 하는지를 정직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폭력적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그 뒤에 있는 침묵, 외면, 그리고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서사를 구성한다. 미자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피해자와 진실에 집중하고, 사회가 외면한 고통을 시라는 형식을 통해 전달한다. 기억이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시를 쓰는 그의 모습은 인간의 존엄과 책임의 마지막 형태를 상징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는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며, 그것은 단지 문학이 아니라 증언이고 윤리다. 이창동 감독은 <시>를 통해 말한다. 인간이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려 할 때, 시는 그 침묵의 공간을 메우는 유일한 언어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언어는 조용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진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