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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맨> 충성의 대가와 시간의 심판을 기록한 스코에시지의 장엄한 비망록

by rednoodle02 2025. 8. 15.

 

<아이리시맨>(The Irishman)은 마틴 스코세이지가 폭력과 범죄의 세계를 다시 응시하되, 이번에는 젊음의 질주가 아니라 노년의 정적과 회한의 밀도로 죄와 충성의 대가를 매만지는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 출신 운전사 프랭크 시런은 우연과 능력, 그리고 폭력의 효율성을 자산 삼아 마피아 보스 러셀 부팔리노의 신뢰를 얻고, 팀스터 노조 수장 지미 호파의 그림자이자 집행인으로 부상한다. 영화는 프랭크의 1인칭 고백을 통해 일과 가족, 충성과 배신, 의리와 명령 사이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스코세이지는 범죄영화의 전통적 쾌감—속도, 과시, 권력의 황홀—을 의도적으로 절제하고, 시간의 마모를 정밀하게 관찰한다. 대규모 러닝타임을 견인하는 건 사건의 굉음이 아니라, 선택들이 쌓여 남긴 침묵과 상흔이다. 디에이징 기술은 스타 배우들의 시간을 되돌리지만, 서사는 그 기술을 역설적으로 이용해 “언젠가 모두 늙고, 고독해지며, 기억조차 퇴색한다”는 무정한 진실을 각인시킨다. 총성이 잦아든 자리에는 장례식과 요양병원, 빈 성당, 대화 대신 닫힌 문이 남는다. 그리고 그 문틈으로 들어오는 미세한 빛처럼, 영화는 늦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질문—‘그 모든 충성은 무엇을 남겼는가’—을 끝내 물어온다.

 

영화 아이리시맨 관련 사진

프랭크 시런: 효율의 윤리와 침묵의 무게

프랭크 시런의 직업윤리는 효율과 복종으로 요약된다. 그는 감정을 일에 개입시키지 않고, 관계를 거래처럼 다루며, 조직의 질서를 어기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전선에서 습득한 ‘작동하는’ 폭력의 기술과 맞물려 러셀의 신뢰를 얻는 핵심 역량이 된다. 프랭크는 ‘왜’보다 ‘어떻게’를 고민하는 인물로, 명령의 맥락을 따지지 않고 수행하는 능숙함이 성장의 발판이다. 그러나 이 효율의 윤리는 가족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녀 특히 첫째 딸 페기의 침묵을 불러온다. 페기는 아버지의 직업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그가 어떤 사람들 옆에 서는지를 직감한다. 프랭크가 폭력을 ‘일’로 명명할수록, 가정은 설명되지 않는 공포와 차가운 거리감 속으로 침잠한다. 영화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건 총성과 피의 비주얼이 아니라, 일이 끝난 후의 일상—식탁에서의 단절, 성당에서의 허위적 평안, 전화기 너머의 꺼진 숨—이다. 프랭크가 호파에게 향하는 그 마지막 걸음은 더 이상 ‘일’이 아니다. 그것은 효율이 윤리를 삼키는 순간이며, 자신의 정체성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그날 이후 프랭크의 침묵은 기술이 아니라 벌(罰)이 되고, 그의 남은 생은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빈 방의 체류가 된다. 효율이 덕목일 수 있는가? 영화는 대답 대신 침묵의 무게를 관객의 어깨에 얹는다.

 

러셀과 호파: 두 권력의 온도차, 의리의 정치학

러셀 부팔리노와 지미 호파는 프랭크를 사이에 둔 두 개의 권력 양식이다. 러셀은 저음의 질서다. 그는 암묵과 신호, ‘가족’이라는 네트워크의 보이지 않는 규칙으로 세계를 굴린다.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고, 타협과 균형을 통해 장기적 안정성을 추구한다. 반면 호파는 고음의 신념이다. 그는 노조의 집단 힘을 믿고, 대중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제도와 싸우는 카리스마로 판을 흔든다. 이 온도차는 결국 충돌을 예고한다. 스코세이지는 누가 옳은지보다, 둘의 방식이 어떻게 공존 불가능한 순간을 맞는지에 주목한다. 호파의 고집은 신념이자 치명적 맹점이고, 러셀의 유연함은 지배의 언어이자 냉혹한 계산법이다. 프랭크에게 이 둘은 각각 ‘애정’과 ‘질서’로 작동하며, 어느 쪽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삶의 기둥이 된다. 그가 선택해야 하는 순간, 충성은 인격의 덕목이 아니라 손익 계산의 결과처럼 보이나, 바로 그 계산이 인간다움을 허문다. 의리는 정치다. 누구의 질서에 서서 어느 선을 넘을지, 영화는 그 결정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그리고 결말에서 우리는 의리의 정치학이 남긴 폐허—명예 대신 기록, 연대 대신 절차, 이름 대신 번호—를 목격한다.

 

시간, 기술, 형식: 장례의 리듬으로 재구성한 갱스터 연대기

<아이리시맨>의 형식적 야심은 러닝타임과 디에이징 기술, 그리고 장례미학의 리듬에서 드러난다. 스코세이지는 빠른 몽타주 대신 장례식 행렬 같은 호흡을 선택한다. 차는 느리게 달리고, 대화는 길게 이어지며, 폭력은 번쩍이기보다 툭 끊긴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위에 입힌 디에이징은 단순한 기술 과시가 아니다. 젊은 얼굴을 한 늙은 몸의 어색함은 영화의 주제—시간이 끝내 승리한다는 사실—를 시각적으로 체화한다. 과거의 활력이 현재의 관절과 맞물리지 않는 이 이물감은, 권력의 전성기가 얼마나 덧없는 유예에 불과한지 일깨운다. 더불어 화면 곳곳에 삽입되는 ‘이 인물은 언제, 어떻게 죽었다’는 자막은 폭력의 결과를 미리 써놓는 부고(訃告) 형식이며, 야심찬 범죄 연대기를 거대한 추모록으로 뒤집는다. 테블로처럼 정지되는 공간, 성당의 잿빛, 병동의 형광등, 무연고처럼 비어 있는 방문은 스코세이지가 쌓아온 갱스터 양식의 말미에 붙는 묵상이다. 과거의 영화들이 권력의 상승과 추락을 다이내믹으로 표기했다면, <아이리시맨>은 잔존과 소멸을 정적의 표면에 새긴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날 때 남는 것은 사건의 서사가 아니라, 남겨진 자의 체온이 사라지는 시간의 감각이다.

 

결론 - 문을 조금 열어두는 자를 위한 기도

영화의 마지막, 프랭크는 요양시설의 침대에서 성직자에게 자신의 죄와 선택을 더듬듯 고백한다. 그는 크리스마스 때 문을 조금 열어두라고 부탁한다. 누구를 위해? 이미 떠난 자들을 위해, 혹은 오지 않을 사과와 용서를 위해, 아니면 끝내 자신의 인생으로 들어오지 못한 신을 위해. 이 작은 청원에는 영화 전체가 응축되어 있다. 충성이라 부른 복종의 시간, 일이라 부른 폭력의 습관, 가족이라 부른 거리의 얼음, 그리고 정당화라 부른 침묵. <아이리시맨>은 갱스터 신화를 해체하는 동시에, 그 신화를 살아낸 인간의 빈자리를 기리며 끝난다. 스코세이지는 관객에게 교훈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늦게 오는 자’의 시간에 머물게 한다. 우리가 오늘 내리는 작은 타협과 침묵이 내일의 빈 방과 닫힌 문이 될 수 있음을, 그 문틈의 차가운 공기가 이미 우리의 윤리와 관계를 식히고 있음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그것이 이 영화가 잔혹한 서사를 품고도 숭고함을 얻는 이유다. 마지막 샷 이후에도, 우리는 각자의 문손잡이를 더듬는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얼마나 더 열어둘 것인가를 자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