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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토냐 > 스케이트와 미디어, 폭력의 굴레를 해부한 블랙 코미디 드라마

by rednoodle02 2025. 8. 13.

 

<아이, 토냐>(I, Tonya)는 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의 삶과 ‘낸시 캐리건 사건’을 다큐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영화는 승자·패자라는 스포츠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계급과 가족 폭력, 미디어 스펙터클이 한 개인을 어떻게 구축하고 파괴하는지 집요하게 추적한다.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은 인터뷰 형식의 교차 편집과 불신할 수밖에 없는 내레이터를 배치해 ‘사실’ 자체의 불확실성을 드러내며, 관객이 쉽고 편리한 결론에 안착하지 못하도록 차갑고도 유머러스하게 서사를 밀어붙인다. 마고 로비는 무표정한 강단과 부서지기 쉬운 취약성을 동시에 구현해 토냐를 영웅도 악인도 아닌, 구조 속에서 버텨온 노동계급의 한 여성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품위’를 강요하는 스포츠 세계의 계급 규범과 여성성의 규격화가 어떻게 배제와 폭력의 장치로 기능하는지를 폭로하며, 승부의 결과보다 ‘누가 이야기의 주도권을 갖는가’를 근본 질문으로 제시한다.

영화 아이, 토냐 관련 사진

계급과 품위의 규범: 토냐 하딩의 불편한 위치

 

토냐 하딩의 재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트리플 악셀을 최초로 성공시킨 선수로서 그는 미국 피겨의 기술적 기준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영화는 토냐가 경기장 밖에서 끊임없이 ‘품위’의 잣대로 평가받으며 배제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심사위원들은 점수판 뒤에서 노골적으로 ‘이미지’를 운운하고, 링크 바깥의 가난한 배경과 거친 말투, 수제 코스튬을 이유로 그녀의 성과를 깎아내린다. 피겨가 요구하는 중산층 이상의 ‘세련된 여성성’은 토냐에게 맞지 않는 규격이며, 그 규격은 스포츠 실력과 무관하게 사회적 출신성과 문화 자본을 평가 항목으로 끌어들이는 장치가 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스포츠가 얼마나 문화정치적인 장(場)인지 폭로한다. 토냐의 분노와 반항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 차별에 맞선 생존의 몸짓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그는 성적을 내야만 하는 선수로서, 시스템과 타협하고 기대를 수행해야 하는 이중의 압력 속에 갇힌다. 이러한 긴장은 토냐를 ‘문제적 인물’로 소비하는 사회의 시선을 역으로 비추며, 관객이 품위 담론의 폭력성을 자각하게 만든다.

 

가족 폭력과 공모: 사랑이 아닌 지배의 회로

 

영화의 정서적 핵은 엄마 라보나와 남편 제프의 반복적 폭력이다. 라보나는 훈육을 명분으로 상처를 주고, 제프는 애정과 협박을 뒤섞어 토냐를 고립시킨다. 이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빈곤과 고립, 성역할 규범이 중첩된 폭력의 회로다. 폭력은 사과와 선물, 간헐적 온정으로 포장되어 관계의 끈을 끊기 어렵게 만든다. 토냐가 링크에서 보이는 공격적 태도와 ‘세상과 맞서는 표정’은 이 회로에서 길러진 방어 기제로 읽힌다. 더 나아가 사건의 촉발점이 되는 ‘계획’은 무능과 허세, 남성적 우월감이 빚은 희극적 참사로, 피해·가해의 경계마저 흐린다. 영화는 피해자성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토냐가 선택 가능한 폭이 얼마나 좁았는지, 그리고 그 좁은 통로에서 때로는 모순된 선택으로 스스로를 상처내는지를 함께 담는다. 이로써 관객은 도덕적 심판보다 구조적 이해로 이동하게 되고, 폭력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닌 제도와 환경의 부산물임을 체감한다. 결국 가족은 안전망이 아니라 통제 장치였고, 토냐는 경기장 안팎에서 동시에 싸워야 했던 셈이다.

 

불신 가능한 내레이터와 미디어 스펙터클

<아이, 토냐>의 형식적 묘미는 인터뷰-재연-직접 발화의 교직이다. 토냐, 제프, 라보나 각자의 증언은 서로 상충하며, 카메라는 때때로 네 번째 벽을 깨고 관객에게 말을 건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파편화된 서사들의 합으로 제시되며, 관객은 ‘무엇이 사실인가’보다 ‘누가 서사를 점유하는가’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이는 90년대 미국 미디어가 스캔들을 소비하는 방식—영웅서사/악역서사의 단순화—을 비판하는 장치다. 방송 클립, 헤드라인, 재연 화면은 토냐를 희화화하고, 대중은 분노와 조롱, 연민을 빠르게 순환시킨다. 영화는 이 스펙터클이 법정의 판결 못지않게 인물의 삶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토냐가 마지막에 권투 링에 서는 장면은 ‘기술’의 세계에서 밀려난 그가 결국 대중 오락의 링에 오르는 씁쓸한 아이러니를 압축한다. 스포츠가 미디어 권력과 결탁할 때, 선수는 주체가 아니라 콘텐츠가 된다. 불신 가능한 내레이터 전략은 바로 이 상품화 과정을 자각시키는 메타 서사로 기능한다.

 

결론 - 승패를 넘어 ‘누가 이야기할 권리가 있는가’

이 영화는 토냐 하딩을 재평가하자고 선동하지 않는다. 대신 승부의 결과와 도덕적 흑백을 넘어, 이야기의 주도권을 되찾는 과정 자체를 드라마의 목표로 삼는다. 계급 규범, 가족 폭력, 남성적 허세, 미디어 스펙터클이 얽혀 만든 ‘토냐 하딩’이라는 이미지에서 한 걸음 물러서 보게 하며, 개인의 결함과 구조적 폭력의 상호작용을 인식하게 한다. 결국 질문은 바뀐다. 누가 승리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이야기할 권리를 박탈당했는가. <아이, 토냐>는 그 권리를 토냐 본인에게 잠시나마 환원하고, 관객에게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하는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마고 로비와 앨리슨 제니의 연기는 이 복잡한 지층을 설득력 있게 떠받치며, 블랙코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