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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과학자의 두 얼굴과 현대사의 경계

by rednoodle02 2025. 6. 29.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3년작 『오펜하이머』는 단순한 전기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과학과 윤리, 개인과 국가, 역사와 책임 사이에 놓인 한 인간의 고뇌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양자물리학의 발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맥락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핵무기 개발이라는 인류사적 사건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이후 어떤 대가로 돌아왔는지를 추적한다. 감각적인 연출과 빠른 편집, 시공간을 넘나드는 서사 구조를 통해 『오펜하이머』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닌 현재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진보를 꿈꾸는가?”, “과학은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관객 각자가 그 질문 앞에서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 오펜하이머 관련 사진

천재 과학자, 영웅이 된 사상가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미국 물리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독일에서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의 물리학 이론을 배우고 돌아온 그는 젊은 나이에 이론물리학을 주도하게 된다. 그의 사상은 철저히 학문 중심적이었고, 인문학적 소양도 겸비한 학자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며 과학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나치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 수 있다는 위협 속에서,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오펜하이머는 그 기술적 리더로 발탁된다. 이 시점부터 그의 정체성은 변한다. 순수학문에 머물던 과학자는 국가와 전쟁의 도구로 기능하게 되고, ‘창조자’로서의 위치에서 ‘파괴자’로 재해석된다. 영화는 그 전환점을 아주 세밀하게 짚어낸다. 특히 폭탄 실험 직후 그가 읊조린 바가바드 기타의 문장,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대사는 오펜하이머의 정체성 붕괴와 책임의 자각을 강하게 상징한다. 그는 천재였지만, 그 천재성은 역사와 맞닿으며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다. 영화는 이를 영웅의 고뇌로 그리지 않고, 한 인간의 선택과 그에 따른 대가로 묘사하며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과학, 국가, 그리고 책임의 무게

『오펜하이머』가 흥미로운 점은 단지 과학적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이라는 질문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이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을 막기 위해 원자폭탄 개발을 선택했지만, 정작 그 폭탄이 투하된 이후 그는 괴로움과 자책에 휩싸인다.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참상은 오펜하이머에게 과학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 경계를 절감하게 만든다. 그는 이후 핵무기 확산에 반대하며 미국 정부의 군사 중심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결국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비국민’으로 몰려 청문회에 서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단지 정치적 박해로 묘사하지 않고, 과학과 국가 사이에서 어느 쪽도 완전히 옹호하지 못하는 인간의 갈등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는 체제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체제를 가능케 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오펜하이머』는 이 양면성을 매우 복합적으로 풀어내며,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오늘날에도 고민해야 할 주제다. 기술이 발전하는 지금, 우리는 그 기술을 어떤 기준으로 사용할 것인가. 영화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춘다.

 

놀란의 연출, 시공간을 넘는 기억의 실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를 통해 다시 한번 ‘시간’과 ‘기억’이라는 테마를 실험적으로 풀어낸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장면을 흑백으로, 그 외 서사 장면을 컬러로 구성해 시점 간의 혼재를 구분한다. 놀란은 단선적인 시간 흐름을 따르지 않고, 관객이 직접 해석하며 구조를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마치 그의 전작 『덩케르크』나 『테넷』에서 보여준 시간 구조 실험의 연장선처럼 보이지만, 『오펜하이머』에서는 감정이 중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폭탄 실험 장면인 ‘트리니티 테스트’는 압도적 긴장감을 자아내며, 소리와 빛의 시차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시청각적으로 표현한다. 이 장면은 단지 기술적 묘사가 아닌, ‘인류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순간’의 체험이다. 놀란은 극도로 제한된 음악 사용, 내부 독백, 주변 인물들의 표정 등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불안과 고립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시각적 블록버스터라기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역사적 무게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놀란은 물리학적 세계관과 인간의 감정을 정교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시간 영화’를 만들어냈다.

 

결론 -『오펜하이머』는 우리 모두의 거울이다

『오펜하이머』는 한 인물의 전기 영화를 넘어, 인류 문명이 과학과 윤리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해왔고, 앞으로 어떤 기준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오펜하이머는 영웅도, 악인도 아닌, 단지 ‘선택한 자’였고, 그 선택의 결과에 끝없이 사로잡힌 존재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지켜봤고, 그 대가로 외면당하고 잊혀졌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몰락에 동정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 같은 선택 앞에서 무엇을 기준 삼을 수 있는가’를 되묻는다. 그것이 이 영화가 단지 과거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도 의미 있는 이유다. AI, 생명공학, 기후 과학 등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는 지금 이 순간,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과학은 중립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것은 단지 한 과학자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그 질문을, 무겁지만 꼭 필요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