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개봉한 마블 영화 『이터널스(Eternals)』는 히어로물의 전형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인간성, 신념, 자유의지 같은 철학적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구에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온 불사의 존재 ‘이터널스’가 창조주 셀레스티얼의 명령을 따르며 인류를 지켜왔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인류 멸망의 위기를 앞두고 그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기로에 선다. 영화는 이터널스라는 신적인 존재들이 감정, 갈등, 그리고 도덕적 선택을 겪으며 점점 더 인간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눈에 띄는 액션이나 영웅적 카리스마보다, 캐릭터 각자의 내면과 신념을 깊이 있게 조명한 점이 기존 MCU 작품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히어로의 존재 이유와 인간다움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마블의 서사 중에서도 철학적 깊이를 갖춘 독특한 시도로 평가받는다.
불사의 삶이 안겨준 감정과 고립의 이면
이터널스는 셀레스티얼의 명령 아래 수천 년 동안 지구에서 인류를 지켜왔지만, 그들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왔다. 데비안츠라는 외부의 위협에 맞서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임무였고, 인간의 내적 갈등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인간과 함께 긴 시간을 보내며 그들은 점차 감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사랑, 외로움, 분노, 공감 같은 감정은 이터널스를 인간답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신념과 사명을 흔들기 시작했다. 특히 세르시와 아이커리스의 관계는 이터널스 내부의 균열을 드러내며,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전지적인 존재로서 절대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감정을 기반으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 사이의 충돌은 이 영화의 중심 갈등이자 가장 인간적인 서사이다. 영화는 이러한 고뇌를 통해 ‘불멸의 존재도 고독하다’는 역설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진실과 충돌하는 믿음, 갈라지는 길 위에서
이터널스가 직면한 가장 큰 전환점은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지구가 사실은 또 다른 셀레스티얼의 탄생 장소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 시점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가 인류 보호가 아닌 창조주의 계획 수행이었다는 사실은 정체성 자체를 흔든다. 세르시는 인간을 구하려 하고, 아이커리스는 셀레스티얼의 계획을 수호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이터널스 내부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들은 친구에서 적으로, 연인에서 적대자로 바뀌어간다. 마블은 이 과정에서 단순한 선악 구도가 아닌 가치의 충돌을 탁월하게 그려낸다. 한 명도 완벽하게 옳거나 완전히 그르지 않기에 관객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터널스는 단순한 히어로 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과 자유의지를 다룬 철학적 서사로 전환된다. 이들이 결국 지구를 선택하는 결정은 명령을 넘어선 자각의 산물이며,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선언이다.
함께하는 선택, 개별성과 공동체 사이의 균형
결국 이터널스는 지구를 파괴하려는 셀레스티얼의 계획을 저지한다. 하지만 이 선택은 모든 이터널스에게 같은 의미로 작용하지 않는다. 세르시는 인간을 향한 애정에서 이 결정을 내렸고, 드루이그는 폭력으로 얼룩진 인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보았기 때문에 함께했다. 반면, 아이커리스는 자신이 믿었던 신념을 거스를 수 없었고, 그 선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자멸을 택한다. 영화는 각자의 시선으로 내려진 선택이 모여 공동체적 결말로 귀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터널스가 결국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통된 명령이 아니라, 감정과 공감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블은 이를 통해 ‘강함’이나 ‘불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해’와 ‘연결’임을 강조한다. 우주의 운명을 바꾼 것은 초능력이 아닌, 감정을 가진 존재들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MCU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결론 – 감정과 선택으로 신화를 다시 쓰다
『이터널스』는 기존 슈퍼히어로 서사의 공식을 해체하고, 감정과 철학을 중심에 둔 내면 지향적 히어로물로 진화한 작품이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들이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들의 사명을 거스르는 선택을 한다는 구조는 전통적인 영웅 서사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터널스는 전지적인 존재로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인간과 같은 갈등, 실수, 감정을 겪으며 점점 더 ‘인간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곧 신화를 다시 쓰는 일이며, 히어로를 신에서 사람으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마블은 이 작품을 통해 우주적 서사를 확장함과 동시에, 영웅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다. 이터널스는 결국 인간이 아니었기에 지구를 구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배운 존재였기에 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이터널스』는 감정과 자유의지가 만났을 때 만들어지는 윤리적 변화의 힘을 보여준, 마블 유니버스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깊은 목소리를 가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