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는 고담시의 빈민층 코미디언 아서 플렉이 점점 광기의 아이콘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DC 코믹스의 악당 ‘조커’ 캐릭터를 재해석한 이 영화는 히어로물의 외형을 벗고, 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인간 내면의 붕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정신 질환, 빈곤, 소외, 계층 격차 등 사회적 이슈들이 아서의 삶에 쌓이고 쌓여 결국 폭발하게 된다. 호아킨 피닉스는 아서라는 인물을 불안정하면서도 처절하게 연기하며, 그 어떤 슈퍼히어로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는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면서도, 그 불편함을 통해 사회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조커는 악당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우리는 어떻게 괴물을 만들어 내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광대의 분장은 단지 웃음이 아닌 절망의 가면임을 깨닫게 한다.
웃음을 강요당한 남자의 슬픈 이야기
아서 플렉은 생계를 위해 파트타임 광대로 일하지만, 현실은 그를 조롱하고 배척한다. 정신 질환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웃는 병을 앓는 그는, 그 웃음마저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와 폭력을 불러온다. 웃고 있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웃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막이자 사회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 된다. 영화는 “왜 그는 웃는가?”보다 “왜 우리는 그의 눈물을 보지 못했는가?”를 질문한다. 이처럼 ‘조커’는 가면 뒤의 진짜 감정과 사회의 무관심이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서의 웃음은 웃기는 게 아니라 슬프고, 슬프기 때문에 더 무섭다. 그리고 그 무서움은 곧 현실의 거울처럼 우리를 비춘다.
우리가 괴물을 만들고 있다
영화 속 조커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사회의 희생양이자 산물이다. 복지 예산 삭감으로 약 처방을 끊기고, 정신 상담마저 받을 수 없게 된 그는 점점 더 현실에서 밀려난다. 지하철에서 발생한 사건은 분노와 억압이 폭력으로 표출되는 첫 장면이며, 이후 그의 광기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하지만 관객은 그를 완전히 비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파괴적인 선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배경을 너무나도 자세히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조커는 영웅이 아니지만, 그를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결국 이 영화는 악당의 탄생기가 아니라, ‘사회는 어떻게 괴물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다.
조커는 우리 안에도 있다
아서 플렉은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는 평범한 이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를 영웅화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그의 분노는 단지 ‘악’이 아니라 ‘무시당한 존재의 비명’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라는 한마디를 무시했고, 그 결과 고담시에는 하나의 혁명과도 같은 폭동이 일어난다. 영화 말미에 조커가 말한다. “이게 웃긴다고 생각해?” 이 한마디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한 조롱이자 복수다. 우리는 웃고 있지만, 진짜 웃고 있는 걸까? 아니면 모두가 광대의 분장을 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결론 – 조커는 영화가 아닌 현실을 말하고 있다
‘조커’는 단순한 DC 코믹스 영화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병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회 심리 드라마이다.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 무시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똑바로 보게 만든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단순한 몰입을 넘어, 관객을 아서의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그의 말라가는 육체, 움츠러든 어깨, 그리고 미친 듯한 웃음은 모두 사회에 외면당한 한 인간의 기록이다. 조커는 악당의 기원이라기보다는, 이 사회가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이상한 사람’, ‘문제아’, ‘미친놈’으로 낙인찍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섭고, 깊고, 불편하며 동시에 아름답기까지 하다. 조커는 우리 안의 어두운 자아와 대면하게 하며, 우리가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과연 누구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은 다소 충격적일 수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